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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nFo/사회

[Why] "오래 사셔야죠" 걸핏하면 협박… 변호사들이 떨고 있다


[Why] "오래 사셔야죠" 걸핏하면 협박… 변호사들이 떨고 있다

“사건 포기해라" 조폭까지 동원해 겁줘, 법정까지 경호 서비스… 재작년 도입후 27명 신청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에서 개업 중인 박모 변호사는 최근 법정을 나서다 '봉변'을 당했다. 복도를 가로막은 건장한 사내 2명이 멱살을 잡고 "오래 살아야지"라고 협박했기 때문. 사내들은 박 변호사가 맡은 항소심 사건의 상대 진영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로 보였고, 박 변호사가 사건을 맡은 이후 재판 상황이 불리해지자 위협을 가한 것이었다. 박 변호사는 "폭력 조직이나 종교, 재산 분쟁 사건을 맡다 보면 더 험한 꼴 겪는 변호사가 적지 않다. 욕설은 기본이고 '죽여버리겠다'는 말도 듣는다"고 했다.

최근 한 일간지에는 '게으른 재판 억울한 재판'이라는 대형 광고가 게재됐다. 광고에는 판사 3명과 대형 로펌 변호사의 실명과 함께 이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특히 상대 변호사에 대해선 주요 경력을 거론하며 인신공격을 가했다. 부동산 관련 소송에서 진 피고 측에서 사건을 진행했던 재판부와 원고 측 변호사를 일방적으로 비난한 것. 서울중앙지법의 한 중견판사는 "패소했을 때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법정 밖에서 '물리력'으로 재판에 영향을 끼치려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라고 했다.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변호사 수난 시대다. 이해 당사자들로부터 사건 포기 요구는 물론 신변 안전마저 위협받고 있다. 국내 변호사는 1981년 1000명 선에 그쳤으나 2009년 말 1만명을 넘어섰고, 내년부터 로스쿨 졸업생이 배출되면 2020년엔 2만명으로 늘어날 전망. 사법연수원 수료 직후 지방에서 개업한 3년차 변호사는 "사건 수임 경쟁이 심해 경제적으로 힘든 데다, 걸핏하면 시정잡배 취급을 받는 등 심리적으로도 괴롭다"며 "변호사 좋다는 것도 이젠 옛말"이라고 했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건설업자에게 회사를 빼앗겼다는 한 기업 사장의 사건을 맡았다가 최근 사임계를 냈다. 건설업자의 배후에 조직폭력배가 있었고, 그 조직원들이 변호사 사무실로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이 변호사는 "처음엔 사건을 맡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더니 이를 거부하니까 나중엔 '변호사 생활 더 하셔야지요'하면서 노골적으로 겁을 줬다"면서 "결국 고민 끝에 그 사건에서 손을 뗐다"고 했다. 그는 수사기관에 신고하고 싶었지만 문제가 확대될까 싶어 그만뒀다고 한다. 또 다른 변호사도 코스닥 기업 대표의 횡령 사건을 수임하고 현금 대신 주식으로 '착수금'을 받았다가 이 기업 대표가 잠적하는 바람에 그 기업을 인수한 사채업자들로부터 "너도 한패냐.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 이 변호사는 보수는커녕 '착수금'으로 받은 주식마저 사채업자들에게 넘겨줬다.

서울지방변호사회에 따르면, 신변의 위협을 느껴 사무실에서 법정까지 경비 인력이 경호를 해주는 '회원지킴이콜서비스' 제도를 요청한 변호사는 재작년 제도 도입 이후 27명이나 됐다.

집단 시위 등 '여론몰이'로 변호사를 압박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지난 6월 서초동 한 법무법인 앞에선 수백명이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소액주주의 돈을 떼어먹은 회사 대표의 변호를 포기하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소송 결과가 불리하게 나오면 다시 항의 집회를 벌이겠다고 한 뒤 해산했다고 한다. 지난 5월 도박규제네트워크 등 300여 종교·시민·사회 단체로 구성된 '도박문제 해결을 위한 범국민운동'은 '도박 조장 5적'을 공개했다. 그런데 이 '5적'에는 강원랜드와 한국마사회, 문화체육관광부 외에 두 개의 대형 로펌이 포함되어 있었다. 강원랜드와 마사회의 소송 대리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지난 3월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선 시민단체 회원들이 재판을 부당하게 진행했다면서 대법관과 판사는 물론 법무법인 이름이 적힌 허수아비 화형식을 열기도 했다.

누구든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헌법 조항과 '변호사는 의뢰인이나 사건의 내용이 사회 일반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수임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는 '변호사 윤리장전'이 마련되어 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여론'에 떠밀려 의뢰인 변호를 포기하는 변호사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부산저축은행 피해자들은 박연호 부산저축은행그룹 회장 등을 변호하고 있는 법무법인 사무실로 몰려가 거칠게 항의했다. 빌딩 진입을 시도하다 출동한 경찰과 몸싸움도 벌였다. 그날 법무법인 측은 박 회장에 대한 사임계를 제출했다. 변호인 사임과 피해자들의 항의 방문은 관련이 없다고 밝혔지만, 법조계 주변에선 "국민 정서를 고려한 결정 아니겠냐"는 반응이 많았다.

최근 고려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에서 가해 학생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들도 논란이 일자 사건에서 손을 떼고 있다. 3선의원 출신 S변호사는 인터넷과 트위터에 비판이 제기되자 자기 블로그에 "법무법인에 소속 변호사로 등록돼 있는 변호사가 이번 사건을 수임하면서 저와 상의 없이 구성 변호사인 제 이름을 무단으로 등재해 벌어진 일"이라며 "관련자들을 엄중 문책하고 해당 사건에 대한 모든 변호사의 사임계를 제출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법조계에선 변호사에 대한 신변 위협과 여론몰이 비판은 변론권 침해이며 결국 변호사 활동 위축에 따른 인권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 검찰 간부 출신 변호사는 "성추행 사건 등을 보면 죄지은 사람은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서도 안 된다는 논리가 되는데, 그렇다면 광장에 세워놓고 인민재판을 하겠다는 발상 아니냐"며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에게도 법적인 도움을 주는 게 사법제도의 취지"라고 했다. 로펌에 근무하는 판사 출신 변호사도 "여론에 떠밀려 사건을 포기한 변호사들 역시 힘든 사건은 안 하겠다는 편의적 발상을 하고 있다"며 "죄인을 변호하는 변호사를 죄인 취급해서도 안 되며 여론에 굴복해 의뢰인을 포기하는 행위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물론 변호사에 대한 경시 풍조나 여론몰이식 비판이 법조계 불신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기 때문에 내부 자정(自淨)으로 국민 신뢰부터 회복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일부 법조인은 여전히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하는 것도 사실"이라며 "사법부의 결정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좀 더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일부에선 국민참여재판을 확대하는 등 민의(民意)를 합법적인 방법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법무법인의 한 변호사는 "법정 밖 시위나 여론몰이가 민의를 오히려 왜곡할 수도 있다"며 "미국처럼 배심원 재판을 과감하게 확대해 사법 심판에 일반 시민의 의견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