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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nFo/사회

엘니뇨의 심술…식량대란 부를까

엘니뇨의 심술…식량대란 부를까

25년만에 美 덮친 최악 가뭄 옥수수·콩·밀 말라비틀어져 한달사이 가격 30%나 급등
엘니뇨 징후 7~9월 더 세져 기상이변에 작황불안 이어질듯 하반기 농산물값 최대 복병
수요 급증했던 2008년과 달리 이번엔 공급부족이 원인 애그플레이션 가능성은 낮아


 지난 11일 섭씨 42도의 무더위와 함께 가뭄이 덮친 미국 중부 일리노이주의 옥수수 벌판. 길쭉하게 자란 옥수수대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지만 옥수수 껍질을 벗겨보면 그 속은 텅 비어 있다. 1988년 이후 25년 만에 최악의 가뭄에다 극심한 무더위가 겹쳐 옥수수 알갱이가 제대로 영글지 못한 것. 이 지역에는 지난 4월 중순 이후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다. 결국 농부들은 '속 빈 강정' 격인 옥수수대를 모조리 베어내 소들의 건초더미로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전체 옥수수 작황에서 3분의 1가량이 피해를 봤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미국은 옥수수, 콩, 밀 모두 최대 수출국이다. 이런 나라에 극심한 가뭄이 닥치다 보니 주요 곡물가격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이들 세 가지 곡물은 식품으로 사용될 뿐 아니라 가축 사료로도 널리 쓰이고 있다. 곡물가격 상승이 육류 등 식료품 가격 전반에 파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옥수수값은 지난달 초까지만 해도 약세였다. 그러나 미국 농무부(USDA)가 이상 고온과 극심한 가뭄을 이유로 옥수수 수확량 전망치를 대폭 하향 조정하고 나서부터 급격한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달 미국 농무부는 "올가을 옥수수 수확량 전망치를 당초 148억부셸(1부셸=25.4㎏)에서 129억부셸로 하향 조정한다"고 밝히고 재고량 전망치도 19억부셸에서 12억부셸로 낮췄다.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서 옥수수값은 지난달 1일 부셸당 5.51달러로 연중 최저치였다. 그러나 한 달 새 28% 올라 지난 13일 부셸당 7.80달러로 올해 최고치를 기록했다.


콩값도 올해 5~6월 조정 국면을 거친 뒤 상승 반전해 지난 9일 부셸당 16.65달러로 금융위기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비슷한 시기에 밀값도 크게 올랐다.


지난달 15일 부셸당 6.09달러로 연중 최저치에 근접했던 밀값이 한 달 새 30% 넘게 급등했다. 옥수수, 콩, 밀 등 주요 곡물이 최근 한 달 새 30%가량 동반 급등한 셈이다.


러시아 농림부도 건조한 기후로 올해 러시아 밀 생산이 전년보다 9.6%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로이터통신은 "올해 러시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을 합친 지역의 밀 생산은 지난해보다 22% 줄어든 7890만t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아시아에서 주로 생산되는 쌀을 제외하고 주요 곡물 가격이 치솟은 배경에는 '엘니뇨 현상'이 자리 잡고 있다.


동태평양 적도 부근 해역의 월평균 해수면 온도가 몇 년 주기로 상승하며 주변 지역에 기상이변을 유발하는 현상인 엘니뇨가 하반기 국제 농산물시장의 가장 큰 '복병'으로 지목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기상기구는 엘니뇨가 올해 7월부터 9월 사이 발달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농산물 가격은 각국 농업정책과 신흥국 수요, 투기 자금 유입 등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농산물의 특성상 기후의 영향이 가장 큰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2주 동안 옥수수 생산지역에 가뭄이 계속될지가 최대 관심사다. 예년에 비해 조기 파종된 미국 옥수수가 향후 2주 동안 꽃가루받이를 성공적으로 마쳐야 하는데, 가뭄이 해소되지 않으면 꽃가루받이가 이뤄지지 않아 작황에 큰 차질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앞으로 2주가 하반기 전체 작황을 결정할 수 있는 것.


오정석 국제금융센터 연구원은 "하반기 엘니뇨 발달로 기상이변이 잦아질 것으로 보인다"면서 "국제 농산물 가격도 기후 변화에 따라 변동성이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농무부 연구원인 리처드 볼프는 "최악의 가뭄이 이어지고 있지만 갑자기 비가 내릴 수도 있는 만큼 농산물 가격이 계속 오를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며 유보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엘니뇨는 과거 곡물 시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장장 19개월간 지속됐던 1986~1988년 엘니뇨 때는 세계 곡물 생산이 2년 연속 감소세를 나타냈으며, 1997~1998년에도 엘니뇨 영향으로 1998년부터 2년간 세계 곡물생산이 600만t 감소했다. 2002~2003년 엘니뇨 때에는 세계 곡물 생산이 5326만t이나 줄어들었다. 1986~1988년과 1997~1998년의 엘니뇨 당시에는 곡물 가격이 오히려 하락했는데 이는 당시 재고량이 많았기 때문이다.


페루의 경우 1983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9.3%를 기록했는데 엘니뇨로 농업과 수산업이 커다란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엘니뇨에 따른 작황 불안으로 곡물 가격이 급등했지만, 2007~2008년 전 세계적으로 식량대란을 몰고 왔던 애그플레이션(agflationㆍ농산물 가격이 상승해 소비자물가가 상승하는 현상)은 재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핵심 곡물인 쌀의 공급이 상대적으로 넉넉한 데다 재고량도 2007~2008년 애그플레이션 때보다 많다는 이유에서다. 미국 농무부에 따르면 올해 세계 곡물 재고율 전망치는 20.1%로 2008년 17.2%보다 높다.


2007~2008년 애그플레이션은 수요 증가가 문제였다. 중국 등 개도국에서 육류 섭취가 늘면서 사료로 쓰이는 곡물(옥수수) 수요가 급증했던 것이다. 그러나 올해는 고온과 가뭄 때문에 작황이 나빠 공급량이 줄어든 것이 원인으로 2007~2008년과 원인부터 다르다.


2007~2008년에 비해 바이오연료 수요가 감소한 점도 애그플레이션 가능성을 낮게 보는 이유다.


2008년 국제유가(WTI 기준)는 배럴당 140달러를 돌파하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 때문에 세계 각국은 석유를 바이오연료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우 2005년 에너지정책법안을 도입해 에탄올의 생산과 보급을 장려했으며 유럽연합(EU)도 에너지 소비 20%를 바이오연료로 충당하도록 법제화했다.


그 결과 2007년 에탄올 생산에 투입된 옥수수는 2000년에 비해 3배 증가했다. 식량으로 사용되는 옥수수가 연료로 쓰이면서 옥수수 가격이 25% 급등했던 것이다.


반면 올해는 유로존 재정위기에 따른 원유 수요 감소로 국제유가가 배럴당 80달러대로 떨어졌다. 게다가 유로존 재정위기가 장기화될 조짐이 보이는 만큼 당분간 유가가 급등할 가능성은 낮다.


이에 따라 원유의 대체재로서 바이오연료에 대한 수요도 자연히 2007~2008년보다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