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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nFo/정치

보씨 가문 영광 … 3대 못 넘기고 풍비박산 위기

중국 공산당 정권 치하에서 권력과 부귀영화를 3대째 누려온 ‘보(薄)씨 3대(代)’의 몰락
스토리가 화제다.
중국 공산당 ‘8대 원로’의 한 명이자 부총리를 지낸 보이보(薄一波·1908∼2007), 그의 아들
보시라이(薄熙來·63) 전 충칭시 당서기, 손자 보과과(薄瓜瓜·25·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재학)가
주인공들이다.



007년 1월 보이보 전 부총리의 장례식장에서 아들 보시라이(오른쪽) 당시 상무부장, 손자 보과과가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두 사람 뒤에 보이보의 영정사진이 걸려있다. [사진 포털 바이두]

보씨 3대는 공산혁명과 신중국 출범 과정에서 보이보가 중공 화베이(華北)국 제1서기를 맡았을 정도로
큰 공을 세운 것을 계기로 집안을 일으켰다. 물론 시련도 있었다. 보이보는 문화대혁명 와중에
홍위병(紅衛兵)에 체포돼 1967년부터 12년간 옥고를 치렀다.


 혼맥으로 쌓은 보씨 가문 영광 … 3대 못 넘기고 풍비박산 위기



그러나 문혁 이후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이 집권하면서 그와 가까웠던 보이보는 다시 최고 권력층으로 진입했다. 82년 정계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원로정치의 산실이었던 중앙고문위원회 부주임으로서 정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덩이 장쩌민(江澤民)을 당 총서기로 발탁하고, 이후 장이 국가주석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보이보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인연으로 장쩌민은 보이보의 아들 보시라이가 정치권에서 출세 가도를 달리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쩌민 집권기간에 보시라이는 랴오닝(遼寧)성 다롄시에서 시장·당서기를 역임했고, 랴오닝성 성장을 거쳐 상무부장(장관)에 올랐다.



보씨 3대는 당대 최고 권력자들과 거미줄 혼맥을 구축하면서 가문의 세력을 키워 왔다.

보이보는 본처를 버리고 비서 출신의 후밍(胡明)과 재혼했는데 둘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이 보시라이다. 아버지의 행태를 빼닮은 보시라이는 베이징시 당서기를 지낸 리쉐펑(李雪峰)의 딸 리단위(李丹宇)와 결혼해 아들 보왕즈(薄望知·리왕즈로 개명)를 뒀다.

그러나 그는 84년 구카이라이(谷開來)와 재혼했다. 구카이라이는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부주임(소장)을 지낸 구징성(谷景生) 장군의 딸이자 베이징대 법대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손자 보과과는 최근까지 중공 8대 원로의 한 명인 천윈(陳云·1905∼1995) 전 부총리의 손녀 천샤오단(陳曉丹·25)과 열애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샤오단은 천윈의 아들인 중국국가개발은행 천위안(陳元) 행장의 딸이다.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스쿨을 졸업한 뒤 하버드대학에 유학 중이다. 8대 원로끼리 사돈을 맺기 직전까지 온 것이다.


그러나 탄탄대로 같았던 보씨 집안의 영광도 3대를 넘기기 어려운 위기에 처했다.

지난달 15일 보시라이가 충칭시 당서기에서 해임되면서 집안의 불행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특히 10일 며느리 구카이라이가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41)를 살해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치명타를 입었다. 이로 인해 아들 보시라이는 정치국원 직무가 정지됐고 기율 위반으로 조사를 받고 있다. 


정치생명이 사실상 끝났다. 


게다가 보과과도 문란한 사생활이 드러나 집안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부모의 스캔들이 폭로된 뒤 보과과가 천샤오단과 결별했다는 소문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을 정도다. 


이런 일련의 사건으로 보이보의 명성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는 평가다. 잘나가던 보씨 3대가 풍비박산이 난 셈이다. 보씨 3대는 지금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