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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nFo/정치

보시라이 낙마, 자오쯔양 실각 이후 최대 정치폭풍


   보시라이 낙마, 자오쯔양 실각 이후 최대 정치폭풍 
 
 권력투쟁 안갯속 중국
 시진핑, 보시라이식 정치스타일 위험성 엄중 경고
 좌파사이트 차단 등 팽팽한 긴장감 속 충성강조
 막후선 새 지도부·중국 미래 싸고 권력투쟁 격화
 




 “당 지도자들은 대중을 선동하거나 유명세, 이익을 쫓지 말고 합의에 기초한 결정 시스템을 준수해야 한다.”
‘보시라이 낙마’ 이후, 중국 차기 지도자인 시진핑 국가부주석이 직접 나서 보시라이식 정치 스타일의 위험성을 엄중 경고하면서 공산당의 단결을 강조했다. 시 부주석은 16일 발간된 당 기관지 <치우스>(구시)에 실은 글에서 “당의 사상적 순수성을 유지해야 당의 단결을 보장한다”고 강조했다.

1989년 천안문 민주화시위와 자오쯔양 총서기 숙청 이후 최대의 정치 폭풍에 휩싸인 중국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시진핑의 기고는 사안의 중대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좌파적 ‘충칭모델’을 내세운 보시라이를 적극 지지해온 ‘우요우즈샹’ 등 주요 좌파 사이트들은 접속이 금지되고 있다. 분노한 좌파들의 역풍을 차단하려는 조처로 해석된다.

보시라이가 사라진 충칭에서는 16~17일 전 간부들을 소집한 회의가 잇따라 열려 장더장 부총리 겸 신임 충칭시 당서기가 이끄는 새 지도부에 대한 충성 맹세가 이어졌다. <충칭일보> 등 현지 관영언론에는 충성과 단결, 안정을 강조하는 보도가 연일 실리고 있고, 보시라이의 이름은 완전히 사라졌다.

리청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은 “보시라이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1989년 천안문 민주화시위 뒤 실각한 자오쯔양 이후 가장 주요한 정치적 인물의 실각”이라고 지적한다. 개혁개방을 이끌던 자오쯔양 전 총서기는 1989년 천안문 광장의 민주화 시위대에 대한 무력진압에 반대하다 숙청돼 가택연금을 당했다. 이후 중국 지도부는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사회를 강하게 통제하면서 경제 고속성장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는 ‘정치개혁 없는 경제성장’의 모델을 만들어냈다.

이후 정치적으로는 덩샤오핑이 구축한 집단지도체제를 통해 철저히 막후에서 합의에 따라 주요 결정이 이뤄졌고, 권력투쟁은 항상 비밀의 문 뒤에 가려져 있었다. 이 과정에서 주요 파벌 충돌이 외부로 공개된 것은 단 두번뿐이다.

먼저 1995년 베이징시 서기였던 천시퉁이 부패혐의로 16년형을 선고받은 사건은 천안문 시위 진압 과정에서 전격 발탁된 상하이 출신의 장쩌민 주석이 최대 정적이던 천시퉁과 베이징방을 제거하고 상하이방의 권력을 확고히 한 계기였다.

이후 2002년엔 1949년 공산당 집권 뒤 처음으로 숙청없는 ‘평화적 정권 교체’를 통해 장쩌민 주석에서 후진타오 주석으로 권력이 이양됐다. 하지만 2006년 ‘상하이방의 황태자’로 불리던 천량위 상하이 당서기가 부정부패 혐의로 체포돼 18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는 후 주석이 이끄는 공청단(공산주의청년동맹)계가 상하이방을 견제한 사건으로 해석됐다.

태자당의 핵심이자 전국적인 좌파의 영웅이었던 보시라이는 천시퉁이나 천량위에 비해 영향력이 훨씬 크다. 아울러 올해 중국은 지도부 교체와 함께 새로운 정치·경제 모델을 만들어내야 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에 서 있다. 대규모 투자와 수출에 의존해온 성장모델이 한계에 부딪혔고 심각한 사회 갈등을 해결할 새로운 정치모델도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보시라이 사건은 공산당 지도부 내의 좌-우, 개혁-보수의 이데올로기 갈등을 더욱 격화시키는 도화선이 될 수 있다.

이와 맞물린 권력투쟁도 더욱 혼전 양상으로 치닫을 것으로 전망된다. 후진타오까지 역대 지도자들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이 선택하거나 승인한 지도자였지만, 이번 지도부 교체는 처음으로 절대 권력자가 아닌 집단지도부 내에서 이뤄지게 된다.

보시라이 실각으로 인한 승자와 패자는 아직 분명히 가려지지 않았다. 우선은 후진타오-원자바오가 이끄는 개혁파 진영이 우세를 점하고, 장쩌민-쩡칭훙이 이끄는 상하이방-태자당 연합이 타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006년 천량위 숙청 뒤 열린 2007년 17차 당대회에서 실질적 승자는 의외로 상하이방-태자당 연합이었다. 천량위를 희생시킨 대신 시진핑을 차기 지도자로 확정짓고,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9자리중 6석을 상하이방-태자당이 가져갔다. 보시라이 같이 막강한 인물이 희생된 만큼, 막후의 투쟁은 훨씬 복잡하고 치열하게 진행되게 됐다.